부전시장과 서면로타리
글 _김세종
하루 종일 도서관에 있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길, 이번 주말 내내 가을비가 내린다 했던 게 생각나 이발소로 발길을 돌렸다.생각해보니 거의 몇 주 만에 전통시장을 찾은 꼴이 되었다.
그간 약간의 우울감이 돌고 이것저것 챙겨야 할 일에 정신이 팔렸는데, 비오기 직전 날도 푸근했던 덕분인지 마음도 좀 풀려서 시장에 들른 김에 토마토와 당근도 샀다. 안 가본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시장이 곧 Market 아니던가, 곧 아홉 시가 다 되가는 데에도 시장은 마무리와 내일 준비로 분주해 나도 에너지가 생기는 것만 같았다.
목적지인 이발원에 도착하고 보니, 사장님도 마찬가지로 오늘 썼던 수건을 정리하며 마칠 준비 중이셨다. 혹시 문을 닫았는지 사장님께 여쭤보니 흔쾌히 들어오라고 하셨다. 사실 두 달 전엔가 마감시간을 한 번 물어봤었는데 그게 여덟 시였나 아홉 시였나, 그건 모르겠고 내가 급하니 이발을 해달라고 들이민 셈이었다.
마침 사장님은 TV를 틀어놓고 뉴스를 듣고 계셨던 모양이라, 나 역시 이발을 하면서 오던 길에 듣던 노래를 마저 틀어놓고 읽으면 되겠네 싶었다.
최근 몇 달간 이 이발원에 왕래하면서 내가 느꼈던 가게의 이미지는 한 다섯 분은 족히 되는 이발사 이모님과 모든 자리를 꽉 채우고도 줄지어 앉아 기다리는 손님으로 패스트푸드점 마냥 신속하게 돌아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사장 어르신과 나 단 둘이밖에 없어 정반대의 고요한 느낌이었지만.
그래서였나, 사장님이 저더러 귀에 꼽고 있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보고 이런 걸 잃어버리지 않느냐며 말을 걸어오셨다. 나는 따로 담아놓는 케이스가 있어서 잊어버리지는 않았다고, 사실 이 앞에 다른 두 개는 어디로 갔는지 잃어버렸다고 털어놓았다.(실은 세 번째 이 녀석도 산지 한 3년 정도 됐는데, 처음 몇 달 반짝 써보고 2년을 묵혔다가 요새 요긴하게 쓰고 있다는 말까지 하진 않았다. 이유는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사장님 왈, 당신은 시계고 뭐고 자꾸 잃어버려서 뭘 가지고 다니지 않는고 하셨다. 심지어 친구 녀석과 길 가면서 통화하다가 “내가 지금 휴대전화를 찾으러 가야 하니까 끊자”고 했더니 친구분이 지금 통화는 뭘로 하고 있느냐고 물은 일도 있었다고 하시더라. 거기에 “저도 한 번은 안경을 쓴 채로 안경을 찾기도 했어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생각해보면 이것저것 많이 생각하고 걱정하면서 다른 일을 하면 놓치는 것들이 생기더라, 그리고 체력적으로 지치면 생각할 기운도 없어서 빠뜨리는 것들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사장님은 당신이 꼭 그랬더라면서 그동안 55년을 일했는데, 늦깎이로 테니스에 재미 들려서 계속 해댔더니 나이 들어 양쪽 무릎이 다 고장이 났다고, 그런데도 손님이 하루에도 200 여명이 오는 가게를 닫을 수가 없어서 수술도 못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재밌는 일, 좋은 일을 오래 하려면 적당히 조절해가면서 했어야 한다고 씁쓸해하셨다.
와 세상에, 손님이 항상 많아 보인다 싶긴 했는데, 하긴 그 많은 이발사들이 하루 종일 손님을 받으면 그쯤 되겠네 싶었다.
이어서 사장님은, 이발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누구에게 맡겨놓고 싶어도 다들 손님이 많든 적든 근무시간 땡 하면 칼같이 퇴근해 어쩔 방법이 없다고도 했다. 네, 참 내 맘 같은 사람이 없지요.
아니 그러면 사장님은 55년 동안 이발업을 하신 건지, 그 시절에 어떻게 일을 배우셨는지 물었다. 사장님은 부산 토박이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부전시장에서 장사를 했던 것도 아니라고 했다. 당신의 고향은 서부경남의 함안으로 형제가 넷, 자매가 한 명인데 집이 가난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고 한다. 그랬던 탓에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산을 몇 번을 넘어서 부산에 건물을 한 채를 갖고 계시던 외할머니댁으로 왔다고 했다.
그 건물에는 이발소와 미용실이 하나씩 있었는데, 이발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밥을 얻어먹었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임금이 다 무언가, 세끼 밥을 얻어먹으면 그걸로도 위안이 되었던 때라고 하셨다. 따로 집도 없어서 가게 영업이 끝나면 시멘트로 된 가게 바닥을 전부 물청소하고, 그게 다 마르면 연탄난방과 난로를 피워서 잠을 청했다고. 연탄은 가게 사장이 아주 천천히 쓰려고 불구멍을 정말 쪼그맣게만 열어놓고 퇴근을 했는데, 그걸 좀 춥다고 더 썼다가는 다음날 대번에 알아챘다고 하더라.

연탄도 화력이 부족해서 손님들이 오는 때에는 추가로 난로를 돌렸는데, 그때는 (노상)열차가 철거되던 시기라, 철로 사이의 침목(나무받침)을 불법으로 수거해서 파는 밀매업자들에게서 사장이 땔감을 사다가 난로를 피웠다고 한다. 실내에서 나무를 불을 때니 마감할 때가 되면 천장이 거멓게 그을음이 묻었다고.
그런 열악한 환경이었는데도 손님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랐단다. 그리고 당시에는 애들이 다 빡빡머리라서 참 쉬웠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여하간 그렇게 허드렛일을 계속하는데, 가게가 번창했는지 어땠는지 이발소 사장이 3년을 연달아 아이를 가져서, 3년이 다 되어갈 즈음에는 아이 셋을 등에 지고 앞에 걸고 돌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때는 물을 구하기가 힘들고 귀했던 시절이라, 허드렛일의 태반은 물을 길어오는 일이라고 했다. 그것도 손님이 한 명 올 때마다 말이다. 그래서, 시골서는 하루 두 번 정도만 물을 길어오면 됐는데, 도회지로 나오니 무슨 하루 종일 물을 길러야 했고, 애까지 봐야 하는 게 힘들어서 버티다 버티다 일을 소개해주신 외할머니에게는 죄송하지만 그만해야겠다며 배신?하게 됐다고 한다.
그다음은 사장님은 조선방직 근처에서 이발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때는 바로 옆 진시장(부산진시장)에서 사과 한 상자를 떼어다가, 이발 일을 마치고 저녁에는 그걸 팔았는데 당시 이윤이 1400원이 남았더란다. (당시 물가가 가늠이 안되는가? 나도 그랬다. 조금만 더 이야기를 들어보시라) 그래서 사장님은 대번에 이발 일을 때려치우고 수레를 하나 사서 과일장사에 나섰다고 한다.
그렇게 노상 장사를 하던 중 한 여인이 가방을 잠시 봐달라며 맡겼다는데, 잠깐이면 된다는 사람이 그날 오지 않더니만 일주일이 다 지나서 미안하다고 나타났다고 했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나중에 그 분하고 결혼해서 수정산 산복도로에 보증금 3만원에 월세 1500원 짜리 신혼집을 구했다고 했다. 그러고는 슬하 형제 넷을 두었다고 하더니 갑자기, 딸을 낳았으면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거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의외였다. 그 시절에 형제가 넷이면 양가에서 경사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사장님 형제도 4남 1녀인데 한 명을 더 낳으시지 그랬냐고 철없는 소리를 했더니, 그때 장모께서도 다섯째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며, 결국 사모님은 중절을 하셨다고 했다.
나중에 결과가 그렇게 되었지만, 네 형제가 저를 닮아서 공부에 취미도 없고, 기술도 배우지 않아 학원을 등록해줘도 일주일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논다고 했다. 사장님이 고민이 많다는 건 그것 때문이려니 싶었다.
마지막 손님을 뒤로하고 전자레인지를 돌리시기에 퇴근하고 무엇을 하시는지 물었다. 사장님은 여기서 간단하게 밥을 먹고, 운동 삼아 집에 들어가 씻고 바로 주무신다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릎 때문에, 그리고 시간을 따로 내어 운동을 하지 못하니 살이 계속 찐다고.
오랜만에 부전시장에서 수십 년의 시간을 걸어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부산과 부모님, 조부모님의 역사가 있었다. 시장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인 만큼 다양한 개인사와 역사가 교차하는 곳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단지 켜켜이 쌓인 당신의 삶을 툭 터놓고 이야기할 일이 그다지 없을 뿐.
생존하기 위해 살았던, 무엇이든 해야 했던 가난한 시절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전후 세대인 나는 얼마나 평온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상전벽해의 세월 속에서 노장들은 변화한 세계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복잡한 마음이 들면서도 그들의 삶의 다이제스트를 듣다 보면, 그 사이사이 다른 에피소드들, 그리고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기회가 닿으면 또 들을 일이 있을 것 같다.
*이 기사는 Closer 1호 10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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